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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한도 끝도 없이 오르고 또 올랐던 그 옛날 벌교의 석거리재

 

https://youtu.be/af2Ns7WkSf4

 

우리 옛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이 내 살던 아우라도 형편이 몹시 안 좋았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 네 자매 중 아직 막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1970년대 초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었다.

 

산중에서 바닷가로 이사했기에 통학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그 등하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집안일 돕는데 애로가 되었다.

- 내가 살던 우리 마을이 초등학교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기에 -

 

초등학교 1, 2학년생이 집안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 나이 때도 은근히 많았었다.

가장 먼저는 젖먹이 동생 녀석 업고 다녀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그 차림으로 집에서 기르던 염소 등하교 전에 들판에 묶어 두던지 풀어서 데이고 와야 했었다.

 

더더군다나 2학년이 되어 아직 초입인 상황에 우리 집 막내가 태어나고 말았다(?).

한창 공부하고 그 틈틈이 친구들과 뛰어다녀야 할 나이에 이건 엎친 데 덮친 꼴이다.

 

그 터널이 점점 깊어가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는 진짜 그때까지의 내 인생 최대의 역경이 오고야 말았다.

학기 초에 반에서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장난기 심한 '못된 동무(?)'가 반장 후보로 나를 추천해 버렸다.

 

산중에서 내려고 온 지도 얼마 안 된 놈이라서 숫기가 없이 늘 움츠리고 살았던 내게 그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온당치 않은 폭동과도 같은 거였다.

그날 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절대로 반장 맡지 않을 것임을 사전에 밝혔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내가 반장에 선출되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반장이 되면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할 일이 한둘이 아님을 반장도 아니었던 그 전에 이미 보고 겪었던 거라서 이건 그야말로 너무나도 기가 막힌 조합이다.

집에 있는 젖먹이 동생들 누가 볼 것이며 해 저물면 몰고 와야 하는 염소는 또 어떡하란 말인가!

 

 

- 방과 후에 남아서 해야 할 것들 -

 

꼭 교육감 오는 날짜가 아니더라도 항상 교실 바닥과 벽의 '환경미화'에 집중해야 한다.

선생님이 초안 작성한 시험지를 등사지에 펜으로 긁어서 초본을 만든 뒤 까만 먹지 누르고 밀어서 수십에서 수백 장의 시험지도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그걸로 시험 본 시험지 채점도 해야 한다.

어떨 때는 남은 우리가 직접 그 상장에 이름을 쓰기도 했었다.

 

반장도 아녔던 놈이 그런 걸 했었는데 정말이지 진짜로 반장이라면 그 할 일이 오죽했을까?

나는 죽어도 반장 못하겠다고 악다구니를 썼었다.

 

그러나 '임명장'까지 나온 마당이라 '반장 거부 투쟁'이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져버렸다.

열흘이 가고 스무날이 가고 한 달이 지나도 나의 거부 투쟁은 멈추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반 전체 동무들이 번호순'으로 '일일 반장'을 명 받았다.

 

그 정도라면 나도 해줄 수 있는 거였지.

그런 상황에서 반장이 특별히 할 일이 또 있었겠는가?

 

아침에 등교했을 때 반장이 일어나서 구령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을 앞에 두고서 '차렷^ 경례!' / 그날의 반장 할 일 끝 -^!^-

 

문제는 해마다 어느 시점이면 꼭 개최했던 '반공 웅변대회'가 문제가 됐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정식 반장'이니까 나더라 대표해서 웅변대회에 나가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아예 원고까지 내주신다.

그것도 방과 후의 일이다.

 

그걸 받은 날 나도 모르게 그 첫머리만 그 자리서 본 뒤 그 뒤론 그거 쳐다보지도 않았다.

- 따라 해봐! 동해 물과 백두산이~! -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이나 다그치자 / 웅변 안 하겠습니다!

 

반장도 아닌 내게 선생님의 그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하루가 멀다고 설득했지만(다그쳤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자 웅변대회 2, 3일을 남기고 부랴부랴 다른 놈으로 교체해야 했었다.

 

그렇게 저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76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우리 마을 근처 숲으로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들어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내 생애 처음 그 덕에 나는 '카빈총'이 아닌 'M1 소총'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아~ 매끄러운 그 총열에 뭉툭한 방아쇠 뭉치!

 

훗날 국방부의 현역(방위병) 시절엔 주로 'M16 소총'을 메고 다녔지만, 실제로 정감이 갔던 건 예비군 훈련장에서 아주 어쩌다가 만난 'M1 소총'이었다.

'카빈총'은 흔했지만, 'M1 소총'은 그만큼 귀했기에 좀처럼 만날 수조차 없는 총이었거늘-

 

아차! 76년도에 들어왔었지!

그해 애 우리 마을에 전기(110볼트)가 들어왔다.

 

우리 집에선 처음엔 반대했다가 나중에 필요해서 따로 설치하려면 그 비용이 훨씬 클 것이라는 협박성 설득에 넘어가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도 전기 가설이 됐었다.

 

전기가 없을 땐 '김 생산' 막바지에 하는 절차로 생김을 잘게 부술 때 커다란 도마 위에 김을 놓고서 커다란 칼로 마구 두들겨서 조각낸 뒤 그걸 얇게 김발에 발라 김 한 장을 만들거나 김을 조각내는 기구(고추를 넣고 고춧가루로 부수는 기계)를 수동으로 돌려서 부수곤 했는데 인제 전기가 들어왔으니 전기 모터에 기구를 연결하여 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또 우리 집이 거기 선착장과 가장 가깝기에 그"때까지는 아직은 짧은 선착장이었지만 그 끝에 기다란 나무 기둥을 세우고 형광등을 달았는데 그 전기를 우리 집에서 끌어다가 달았다.

물론 그 스위치가 우리 집에 있었기에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그 스위치도 우리가 올려야 했었다.

 

그러다가 우리 아버지 김 생산을 준비하는 늦가을에 그만 쓰러지셨다.

그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모든 주변으로부터 영영 떠나고 말았다.

 

그런 중에도 나는 중학교 들어갔었다.

초등학교는 그 처음만 냈지 곧바로 공식 학비(납부금 또는 육성회비)가 없어졌기에 견딜만했을 텐데-

아직은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니까 우리 어머니 그 무게가 덜했을 텐데-

 

이내 아버지 돌아가시고 / 곧이어서 내가 중학교 들어갈 시점이 되고-

우리 어머니 그 무게 오죽했을까-

 

중학교에서 가장 먼 거리에 우리 마을이 있었지만, 버스가 있는데도 2년을 나는 걸어서 다녔다.

그 초기엔 '영어 단어장' 들고서 말이다.

그로부터 내가 아는 영어의 전부가 그거였다. / 그 뒤로는 영어라고 생긴 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실력이 늘래야 늘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3학년이 되니까 철없고 속없이 조르고 졸라서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했었다.

 

이윽고 중학을 마칠 즈음이 되자 또 상급학교 진학 문제가 우리 집에 대두되었다.

우리 집안 환경이 그럴만한 상황이 안 됐으니 나도 포기 / 어머니도 포기!!!

 

그러나 학교에서도(선생님) 또 주변에서도(집안의 문중) 어찌나 보챘는지 우리 어머니 빚더미에 앉더라도 어쩔 수 없이 보내기로 하셨대.

 

어제 늦은 시각에 그때 진학했던 그 학교에서 짝꿍으로 처음 만났던 그 친구 놈이 저 마누라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았다.

녀석은 지난 몇 년을 '암과의 사투'로 만신창이가 됐던 놈이다.

 

그랬던 놈이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찾았던 거다.

'암' 걸렸던 것이 죄송해서 차마 우리 어머니 얼굴 뵐 낮이 안 섰다나 뭐라나!

 

이 녀석 어머니께 절하려는 걸 우리 어머니 죽자 살자 그러지 말라고 반대하신다.

녀석이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는데 여러 벌의 웃옷을 꺼낸다.

 

그 모두를 나한테 주려고 사 왔다 한다.

 

- 이걸 받아야 해 / 말아야 해!!! -

정말 난감하더라.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찾아온 놈이 저 마누라와 함께 이걸 내밀고 있으니….

나는 개 마누라한테 '하느님!'이라고 불러왔었다.

 

암으로 다 죽게 됐던 놈이 겨우 살아나니까 또 입에 술을 댔단다.

그 마누라 그 간장 오죽이나 닳고 삭았을까….

 

하느님이 아니면 그렇게도 '개차반'인 녀석을 오랜 암 투병에서 건져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 그 꼬락서니에서 버텨내지도 못했을 거 아닌가!

그랬기에 오랜 세월 그분을 나는 '하느님'이라고 불러왔었다.

 

그랬기에 어제는 부부가 거실에 들어섰을 때 친구 놈 보다도 우리 하느님 꼭 껴안았었다.

그랬지만, 무슨 까닭에 그간 꾸준히 불렀던 '하느님!'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너무나도 반가워서 그랬을까? 너무나도 흥분해서 그랬을까?

 

나중에 그녀가 전해준 옷^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뜸 받는 것처럼 그 뜸 들이는 시간 최대한으로 줄였지만, 왠지 내키지 않더라!

 

[받지 마! / 받지 마!! / 절대로 널름 받아선 안 돼!!!]

 

그 녀석(친구)과 한때는 같은 공장에 들어갔었다.

내가 대구에 살고 있을 때 사실은 녀석이 내 서류까지 다 준비해서 그 회사에 제출했기에 1차 합격하여 면접 날짜를 알려준 거였다.

 

대구에서 부랴부랴 나오면서 식당에 식비 등의 외상값을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었다.

그랬기에 나중에 대구 공장 급여일에 다시 찾아가 그 외상값을 모두 갚고서 나왔었다.

 

오래 살지도 않고 달랑 1년도 채 못 살았지만, 대구 사람들 너무나도 좋았었는데-

나와 함께 용접했던 김형, 경태형, 플래너의 철호 형, 지금은 그 이름도 잊어버린 선반에서의 두 형님….

특히나 용접사 경태형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앞 공장의 형님 친구 '중현이 형'이라고 했던가? 그 형도 궁금하고….

 

광주에서 면접에 통과하자 나는 경력직으로 들어갔기에 서류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예전에 '밀양'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막냇동생한테 대구의 공장 위치와 동사무소 위치 알려주고 서류 좀 때 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함께 들어갔던 친구 놈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나오자 스스로 퇴사해 버린다.

그 까닭이 '회사에서 잘리기가 싫어서 그렇다네!'

 

아직 잘리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미리 겁먹은 모양이더라.

어제도 내 막냇동생과 그 이야길 나누더군!

 

그때가 1988년도였었는데 그 시절은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공안정국'에 커다란 골머리가 됐을 때였다.

걸핏하면 '노동조합 활동가'를 '용공 분자'로 매도한 뒤 구속해 버리고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다니던 회사(공장)에서도 잘렸겠지.

 

대학생이 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회사에 들어와도 같은 '악명 / 혐의'를 덮어씌우고 사회에서 매장했지.

그런 피해가 두려웠기에 녀석이 선수 친 거였다고 어젠 우리 막냇동생한테 의기양양 떠벌이더군!

 

그래봤자 나도 그 몇 년 뒤에 공장에서 잘렸거든-

 

그건 그렇고 고등학교 다닐 적에 나는 두 번이나 자전거로 고흥에 내려갔었다.

 

그중에서도 그 두 번째 경우가 유독 더 생각난다.

 

한번은 비가 대개 많이 내렸다.

 

그래서 바닷가의 시골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

 

죽자 살자 페달 밟아서 우리 마을의 바로 옆 마을까지 당도했는데 거기서부터는 길이 막혔더라.

우리 마을과 옆 마을 사이 거리가 1km쯤 되는데 오랜 옛날의 비좁은 산길 말고도 그 산자락에 신작로가 나 있다.

 

그런데 그 신작로 너무나도 비탈이 많기에 걸핏하면 무너져 내린다.

그 길이 모두 무너진 건 아녔지만, 단 한 군데라도 무너졌다면 거길 다 치우고 축대 쌓기 전에는 진입할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산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 산길은 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산중에서 등하교했던 길이었다.

그 길이 신작로에서 짧게는 4, 50미터쯤 떨어졌고 옆 마을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초입은 신작로보다 8, 90미터는 더 올라가는 지점으로 이어졌기에 끊임없이 그 비탈을 자전거 매고 끌고 올라가야 했었다.

 

산길은 또 사람이 안 다니니까 온통 잡목과 수풀이 덮이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더라.

그렇게 산을 타고 시골집에 들어갔더니 세찬 바람결에 지붕 걷히고 난리더구먼.

 

그건 그렇고 어머니와 충돌이 생겨서 나는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더라.

새벽에 즉시 자전거 돌려서 광주로 향했지.

 

그 산길을 다시 걷고 매어 건넌 뒤 이웃 마을 다가와서 어깨에서 자전거 내린 뒤 다짐했어.

[지금 자전거에 오르면 광주에 닿을 때까지 죽어도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고흥을 지나 과역을 지나 벌교 가까이 들어왔는데 너무나도 배가 고프더라.

그런 순간에 길가까지 뻗은 뉘 집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그 감 - 정말이지 먹고 싶더라.

 

이건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 정확히 말하면 너무나도 배가 아팠어!

 

'인제 조금만 더 가면 그토록 악명 높은 [석거리재]가 나올 텐데….'

 

지금에 와서는 그 자리에 새로 뚫려서 천하의 선량 같지만, 그 시절은 끊임없이 오르고 돌고 돌았기에 그 오르는 길이 정말이지 '사형대'와도 같은 거였다.

자전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내리지 않기로 했기에 나는 그 각오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 마지막에 쓰려고 아꼈던 비자금을 털어야 했다.

 

길가에 난 가게 앞에 자전거 세우고서 소리쳐서 그 주인을 불러냈다.

그러고는 내가 사정이 있어 내릴 수 없으니 '알사탕 한 봉지' 달라면서 나의 비상금 총액 '오백 원'을 건넸다.

 

그리고 그 알사탕을 터서 한쪽 손에 쥐고 '석거리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지.

그렇게 얼마간을 오르자 이내 무릎이 부서질 듯이 아파지더군.

 

너무나도 힘이 드니까 하마터면 넘어질 뻔(자전거에서 나도 모르게 내려설 뻔)했었다.

겨우 발을 내려 바닥에 짚고서 알사탕 하나를 깨물어 입에 넣었지.

 

어떨 땐 서서 페달을 밟으면 무릎이 덜 아프기도 하지만, 그도 겨우 두 세 바퀴가 다였다.

그 선이 되니까 인제는 페달 한 바퀴를 돌릴 때마다 사탕 한 알이 에너지로 필요하더라!

 

그렇게 오르고 올라서 마침내 석거리재 정상이 눈앞인데도 그 경사 완만해 보였음에도 끝까지 얄밉게도 자전거에 탄력 한 톨 붙지 않더군.

마지막 정상에서 고개를 넘으니까 드디어 무릎이 한결 편해지더라!

 

그쯤에서는 내려간 길이면 핸들에서 손을 놓고도 탈 수가 있었지.

뿐만 아니라 핸들에 차라리 아팠던 두 다리 올리고서 탈 수도 있었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하니까 그럴 맘도 사라지더군.

사실 고흥으로 내려간 길에서의 그 석거리재에서 그 짓거리로 달리다가 문득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니까 어느 순간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들더라.

그런 순간에 그 옛날에 들었던 짬-

브레이크 강하게 잡아선 안 된다!

최대한 몸에 집중하고서(핸들을 잡았지만, 몸으로 운전했던 때처럼)-

브레이크 약하게 빠른 손놀림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잡아라!

 

속도가 줄어든 것을 감지했다면 이미 이 사태 제대로 풀어낸 거다!!!

 

그렇게 석거리재를 통과했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달려서 이윽고 화순에 약간 못 미친 지점인 '사평' 근처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아주 힘겹게 페달 밟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아래쪽에서 '톡!'

 

오른쪽 페달이 부러져버렸네.

나도 모르게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었는데-

하마터면 내려올 텐데-

겨우 얼떨결에 중심 잡고서 정말 어려운 자세로 부러진 페달을 주워 들었다.

 

참 희한하게도 부러졌더라.

페달 축 바깥쪽 말고 안쪽 베어링 박힌 부위 바로 곁이 성냥개비만큼의 생살이었는데 그 자리가 부러졌던 거였다.

부러진 페달은 그 자리서 던져버렸지만, 크랭크 쪽에 아직 붙은(살아남은) 페달 축이 1~1.5센티미터쯤 됐기에 그 부분을 지렛대 삼아서 어떻게 크랭크를 돌리고자 했다.

 

어떡해서든 멀쩡한 페달을 세차게 밟고서 그 관성으로 반 바퀴를 더 돌리면 아까 그 아슬하게 붙은 쪽 페달 축을 엉거주춤 밀어서 나머지 크랭크를 돌리는 거였다.

그렇게 있는 힘껏 매달린 나머지 드디어 화순의 너릿재터널까지 들어왔다.

 

그랬는데 여기 너릿재터널에 또 한 번의 시험대가 준비됐더라.

처음 대략 50여 미터는 그럭저럭 터널 가상의 수로를 덮은 '맨홀뚜껑(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음)'을 밟으면서 통과했는데 어느 순간에 여기서도 모든 점등이 꺼져버렸어.

 

나는 지금도 그 까닭을 몰라.

차 몰고 다니는 분들은 그 까닭을 알겠지!

 

본래 터널은 점등되지 않고 꺼진 것이 맞는 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때 갑자기 깜깜해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그 시절은 지금처럼 차가 많았던 시절도 아니었기에 오가는 차량 불빛을 등대 삼아서 지나려고 했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도 짧았어.

 

그리고 그런 기막힌 순간에 왜 그렇게도 맨홀뚜껑은 자꾸 뒤집혔는지도 모르겠더군.

발을 헛짚은 듯 뒤집히니까 하마터면 약속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자전거에서 내릴뻔했지 뭐냐!

왜 그렇게도 터널이 길었을까???

 

그렇게 온갖 고초를 안겼지만, 결국은 그 자리도 벗어났지.

그러고는 쭉 강도가 센 고도가 없었기에 안정적으로 거기서 무등경기장 부근까지 올 수가 있었지.

 

그 근방이 내가 자취하던 집이 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마음이 풀어진 탓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배가 고프더라!

그랬기에 아무 가게나 들어가기로 작정했지.

 

'일신방직'에서 '무등경기장' 쪽으로 오다 보면 거기 약간 높은 턱을 지나면 곧바로 그 옛날 포장마차가 즐비했던 무등경기장 앞 넓은 공터가 나오지.

그런데 거기까지 말고 그 턱을 못 미쳐서 일신방직 쪽으로 7, 80미터 거리의 조금 낮은 곳에 '무슨 만둣집'이 있었거든.

고흥에서 자전거에 올라탄 뒤 처음으로 자전거에서 내려 거기 가게 앞 적당한 곳에 세우고 만둣가게로 들어갔지.

 

그러고는 주인장한테 내 사정을 솔직히 다 털어놓고서 만두 3인분만 달라고 했어.

나중에 갚겠다며 사정한 거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처녀인지 아줌마인지 모를 여인이 주인장이었는데 내 말 듣더니 대뜸 내주는 거야.

-- 아이~ ♧♣§ ♬ --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 3인분을 다 먹고서 2인분인지 3인분인지 더 시켜 먹었거든!

 

요즘 같으면 내가 약아빠져서 '아가씨'로 불렀겠지만, 그 당시는 너무도 어렸기에 그랬는지 대뜸 '아줌마'라 불렀지.

 

00 아! 아주머님 고맙습니다! 00

 

그때가 1982년 어느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