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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그때 그 시절~

류중근 2024.09.03 15:49 조회 수 : 2

그리워라 그때 그 시절~

 

네이버에서 출시한 폐쇄형 소통 창인 밴드(SNS) 홈피에서 '벌교 꼬막'을 내세운 어느 밴드 광고를 봤다.

'아~ 꼬막^ 먹고 싶다!!!'

 

꼬막 그거 한 대야를 삶아서 그만한 함지에 바로 꺼내 두면, 살짝 짭짤하지만,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꼬막을 벌려야 나오는 따끈한 국물도 마찬가지고-

 

아주 어렸을 적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시점이 되니까 우리 집은 산중 오두막에서 담장 아래가 바로 바다와 연결된 바닷가까지 이사했었다.

거기가 너무나도 바닷가니까 태풍이라도 불어올라치면 집안이 어찌나 요동치던지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녔었다.

 

담장 무너지지 / 벽체 갈라지고 터지지 / 초가의 지붕이었는데 제아무리 꽁꽁 둘러 감싸도 그 바람이 너무나도 세니까 지붕이 날아가고 벗겨져서 곳곳으로 비가 새 들어오지-

 

그 시절 그때는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런 건 딱 그때뿐이고 태풍 지나고 나면 적막강산 참으로 평화로워지고 그 바다가 생활 터전으로 숨가파진다.

태풍급은 아니더라도 연안에 '폭풍주의보'나 '파랑주의보'가 내리면 물살이 거세져서 조업(생계 활동)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런 날을 뺀 모두는 한날한시고 거르지 않고 육지에서 운전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처럼 분주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님 저세상으로 떠나자 집안의 장손인 내가 그 규모는 작았지만, 본격적인 김 생산에 들어가는 겨울 한 철을 빼고 나머지 계절 동안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책임져야 했었다.

우리 집에선 작은 목선으로 '통발로 게 잡는 업'을 소규모(20~30개 남짓)로 했었다.

 

그 시절의 통발은 오늘날의 통발과는 달리 시장에서 굵은 철사와 그물을 떠다 그 형체와 틀을 만들고 대나무를 깎아서 틀이 무너지지 않고 곧게 펴지게끔 팽팽하게 고정도 했었다.

미끼 달아둘 미끼 고리도 철사로 만들어 통발 안에 채워두고-

 

그렇게 통발 하나가 만들어졌다.

시장에서 사 온 그물 통발 하나를 만들 만큼의 크기로 절단해온 그물 수효만큼 굵은 철사도 사 온 뒤 일일이 자르고 굽혀서 통발 틀을 만들고 그 틀 밖으로 그물을 씌워 그물과 틀이 상호 작용하게끔 적당히 꿰매고 그물의 양 끝엔 게가 미끼를 찾아 들어간 뒤로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게끔 호리병 모양으로 그물 끝을 오므려서 둥그런 입구를 만들어야 했었다.

 

손질이 참 많이 가는 작업이라서 방학 때나 밤중에 주로 만들었을 거다.

 

그렇게 만든 통발을 대략 10미터 간격으로 줄줄이 묶은 뒤 미끼를 채워 연안에 길게 빠뜨려 뒀었다.

다른 그물도 마찬가지지만, 빠뜨릴 때나 조업을 시도해도 배가 나가는 방향을 조류 방향에 맞춰야 한다.

이는 바람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 방향이 일치하지 않으면 통발이 됐든, 고기를 잡는 일반 그물이 됐든 그물이 엉켜버리기에 길게 늘어뜨릴 수 없는 까닭이다.

정답이 조류 방향임에도 하필이면 바람 방향과 정반대의 날에 그 바람 세기마저 강하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물 위에 뜬 배는 바람에 밀려서 바람 방향으로 가고자 하고 / 물 아래로 그물은 조류 방향에 따라 제 갈 길에 들어서고-

그러니까 그런 순간엔 누군가가 맞바람을 향해 노를 저어야 했는데 홀몸으로 한 손엔 엉키거나 빠뜨리지 않게 그물도 펼쳐야지 / 다른 손으로는 바람에 맞서서 힘주어 노도 저어야지.

 

그렇게 빠뜨린 통발을 매일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건져 올려 거기 들어간 어물(게·해삼· 낚지·문어 등등)을 건져 올려야(조업) 했다.

이런 방식으로 건진 어물을 그 각각을 한데 두면 생태계 최상위 놈한테 모두 먹혀버리니까 그 각각을 따로 마련한 '살림망'에 집어넣고 그물(통발)의 양 끝에 매달아둔 살림망에 모아 뒀었다.

 

그런 다음 시골 5일장이 서는 날 그 양이 팔러 가도 될 만큼인지 확인한 뒤에 커다란 고무 대야 같은 통에 담아서 그 시장에 팔러 가곤 했었다.

그 부분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그렇게 벌인 돈으로 우리(우리 형제가 넷) 학비도 대고 다른 물품(곡식이나 일상에서 쓰는 살림 거리)을 사는 데도 보탰다.

남의 야산을 개간(어머니 아버님의 신혼 초 산중에 들어갔을 때) 해서 만든 큰 밭이 있었지만, 퇴비 등의 비료를 제대로 못 해 늘 밭은 거칠고 단단히 굳어서 그 산자락의 밭을 쟁기질로 갈아엎어 달라고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매우 곤란한 지경이라서 우리 집은 그토록 통발 갖고 게 잡는 일에 집중했었나 보다!

 

밭이 걸지 않으면 사람도 고생이지만, 정작 죽을힘 다해서 가쁜 숨 몰아쉬는 건 '쟁기를 끄는 소'였었다.

그랬기에 뉘 집 소가 됐든지 나는 늘 그 소한테 미안하고 또 고마웠었지.

 

'이랴! 저라^ 호통과 채찍! 그리고 마치 죽을 것만 같은 코뚜레의 낚아챔~!~

모진 고문도 그보다 더함이 또 어딨으랴!!!

돌이켜보면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꼬막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샛길로 한참이나 벗어났는데 다시 그길로 나서야겠다.

 

남해안 대부분은 연안이 '개펄'로 형성되었는데 우리 마을 앞 바닷가는 매우 드물게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100에서 150미터가량이 개펄이 아니라 '걸'이 덮였다.

밀물의 끝까지 차는 해안 쪽으로는 본디 아기 주먹에서 어른 주먹만 한 동그란 '몽돌'로 가득했었는데 객지 경험이 있는 누군가가 와서 몇 날 며칠을 그 바닷가 전체를 두르면서 모조리 마대에 채워 훑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해맑은 그 몽돌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납작하거나 길쭉한 비정형의 돌조각(조약돌이 아님)이 널리 퍼졌다.

- 아~ 못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

 

밀물 때면 차오르기도 하는 경사진 그 자리를 벗어나 썰물 때가 아니면 늘 바닷물에 잠긴 아래로 내려가면 거기서부턴 평지에 가까워지고 바닥 색깔부터가 펄 색을 띤다.

거기서부터는 바닥이 납작한 돌이나 바윗돌이 깔렸는데 그 바탕은 대부분이 거친 모래땅이다.

 

그런 자리를 호미로 파면 아까 말한 꼬막을 닮은 바지락이 들었다.

그 바지락도 바닷가 쪽으로는 해서는 너무나도 작기(알에서 갓 깬 새끼처럼 손톱 크기 정도)에 손대지도 않고 바다 쪽으로 나아갈수록 굵어(손톱 크기를 지나 엄지손가락 첫마디 정도쯤의 크기)진다.

 

그건 바지락뿐이 아니고 다른 어패류도 마찬가지다.

 

얕은 곳에선 까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크기에서 깊은 곳으로 갈수록 그 굴의 크기도 점점 커지기에 제법 국거리로도 생으로도 먹음직스럽다.

한 달에 매번 두 번(초승달·보름달)씩 그간만의 차(밀물·썰물)가 최대가 되는데 그때는 썰물이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순간 평상시 해안에서는 구경도 못 할 별것들이 저 깊은 물가에 지천이다.

 

바지락도 굵고 짙은 파래·청각도 있으며 심지어는 장어나 문어도 거기 바윗돌 틈새나 바닥에서 파낼 수도 있다.

해마다 어느 철이면 가장 그간만의 차가 가장 커진 날이 있는데 그날은 평상시 많이 빠진 시점에 비애 10~15미터는 더 물이 빠진다.

진도 앞바다 바닷길이 열리는 때(진도 신비의 바닷길)가 바로 그런 시기의 물때이다.

 

그 시점에 바닷가에 들어가 보면 지천에 해삼이 즐비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해삼 너무 어리니까 잡아서는 안 될 거였는데 철없던 그 시절엔 그걸 생각도 못 했다.

 

현대의 우리 바닷가에선 해마다 일정 기간 특정 어물에 대해 물량 확보를 위해 채취를 금지하는 '금어기'를 주는 모양이더라!

그 시절에도 그 비슷한 게 있긴 있었을 텐데 바닥을 그물로 끌고 가서 어미 새끼 구분 없이 잡아버리(싹쓰리)는 조업 방식만이 불법이라고 앓았거든.

 

나는 그 물때에 물이 쭉 빠져서 저 아래까지 내려가면 잠방잠방 이제는 물이 더는 빠질 수 없는 거기까지 들어가서 바위를 더듬어서 주로 게를 잡았었다.

그렇게 잡은 게들은 일상에서 흔히 접한 그런 게(돌게, 혹은 독게)가 아니다.

거기서 그렇게 커다란 게도 잡고 낙지도 잡고, 해삼도 줍고, 또 하나는 커다란(어른이나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 굴도 있었다.

 

우린 그걸 '피굴'이라고 불렀는데 섬진강 하구의 풍천에서 나는 피굴을 텔레비전에서는 벚굴이라고 하더라!

 

딱딱한 게 등껍질은 일반 게처럼 매끈하지 않고 '굴통'과도 같은 불량한 어패류가 거기 붙어서 공생한다.

그뿐만이 아니고 그 게 등껍질에 물풀 같은 게 붙었을 때도 있다.

 

그 생김새부터가 우락부락하기에 먹고 싶은 맘이 절로 달아난다.

그래도 국으로 끓이면 제법 게 살맛이 올라오거든.

 

게는 아무리 급해도 구워 먹을 놈은 절대로 아니다.

천하에 요물이고 고기 잡는 그물을 망가뜨리는 주적으로 '쏙'이란 놈이 있다.

그것 크기가 성인의 긴 손가락 정도 되는데 그 생김새는 새우를 많이 닮았지만, 실제로는 새우와 달리 온몸이 가시로 덮였기에 놈이 그물에 걸리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러기에 이놈들은 그물에 걸린 다른 고기(숭어, 양태, 노래미 등등)를 먹기 위해서 무더기 그물을 찾는다. -

 

그렇게 ‘쏙’이 빨아버린 고기는 뼈다귀와 껍질만 남기에 상품 가치는 고사하고 쏙하고 함께 엉켜있기에 떼어내는 것도 이만저만한 노고가 아니다.

 

내 어렸을 적에 고기 잡는 마을 어르신들이 바닷가 다녀오면 멀쩡하고 굵은 고기는 이미 바다에서 떼어 다른 용기에 담아오지만, 쏙과 같은 요물들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까 그물에 매단 채로 육지까지 끌고 온다.

놈들을 빨리 떼야 다음 물정을 만나기 전에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을 텐데 그 못된 동물 부류인 ‘쏙’ 들이 그물을 점령하고 있으니까 거기 모여든 동네 이웃들에게 부탁했었다.

 

그물에 달린 것이 ‘쏙이든 아니든 다 가져가도 좋으니까’ 제발 그물에서 떼어가시라고-

그렇지만, 그물을 뜯어버리면 안 됩니다. 조심조심 살살 뜯어주시라고요! -

 

내가 어렸을 적에 다녔던 초등학교 교문 앞에도 풍천(민물 바닷물이 만나는 자리) 있었기에 우리 동무들은 그것에 들어가서 장어의 어린 치어를 잡아 용돈으로 쓰고 공책과 연필 등의 학용품도 샀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 풍천엔 치어보다는 다 큰 장어의 성어가 흔했으려나?

 

게잡이 통발에는 바닷장어도 들지만, 이따금 민물장어도 들어와서 우리 기분을 흡족하게 해줬었다.

민물장어가 바닷장어보다 더 비쌌거든.

 

아버지 계실 때는 그 양이 적었지만, 대여섯 폭(한 폭당 20~25미터쯤이 아니었을까?)이 있어 그물을 놓기도 했었는데 그 아버지가 가시고 나니까 처음 얼마간은 썼었는데 어느 순간에 없어졌다.

어쩌면 태풍에 그걸 다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조류 방향으로 한 손으로 노를 젓고 다른 손으로는 손에 쥔 그물을 서서히 풀어가면서 놨던 기억이 아득하다.

봄여름 가을 준비했다가 드디어 겨울이 되어 펄밭의 바닷속에 연달아 박은 지주에 줄줄이 걸어둔 김발에서 수확할 만큼 김이 자라면 그 김을 뜯어다가 차로 씻고 다음 날 새벽에 잘게 부수어 2차로 씻은 뒤 한 장 한 장 김을 만들어 건장에서 말린 뒤 그걸 10장씩 개고 나중에 다시 100장 한 묶음(한 속) 단위로 포장해서 모든 뒤 훗날 내다 팔았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녔던 어느 방학철에 나는 김 한 상자를 어깨에 메고 광주로 올라와서 양동시장을 찾았다.

그러고는 거기 도매시장에서 도매로 넘기고는 그 돈을 받아 병원(비뇨기과 병원)을 찾았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을 직접 팔았던 날이다.

그리고는 내 가운데 것 꺼내서 눈앞에서 싹둑싹둑 수술(포경수술)했었다.

 

그 기분 정말이지 찢어졌었다.

- 여친을 위한 나만의 '지극히 소중한 자원봉사'쯤으로 여겼을 때니까 -

그런데 기분만 그랬지! 나의 그녀에게 막상 써먹을 일(?)은 좀처럼 생기지도 않고 훗날 애먼 데(?)서 허무하게 써먹게 되더라!

 

흐흐-

오늘 무심코 들여다본 꼬막 덕분에 옛 추억을 더듬어보네.

 

막상 엊그제는 그 옛날 살았던 고향 집(터) 근처까지 내려갔지만, 막상 살았던 집터 근처로는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었다.

 

아흔을 넘기신 우리 백모(큰어머니)께서 이 세상 하직하시고 저세상으로 떠나셨거든-

먼저 가신 백부(큰아버지)께서 '국가 보훈자'셨기에 백모(큰어머니)도 그 절차에 따라 국가 보훈자 안치실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에 그게(현충원) 한두 개 더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전북 임실(치즈로 유명한 지역)에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국립 임실 호국원(충령당 제1관, 충령당 제2관) -

https://www.mpva.go.kr/isnc/selectBbsNttList.do?key=591&bbsNo=149&nttNo=194686&searchCtgry=&searchCnd=all&searchKrwd=&integrDeptCode=&pageIndex=1

 

장의사 버스가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그것 따라갔다가는 아무래도 일(?) 터질 것 같기에 다소 안전 운전 상태로 따라갔더니 우리 차가 한창이나 늦었다.

거기서는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난감했는데 마침 누군가가 지내기에 물었더니 '저쪽 끝의 제2관으로 가보세요!' 그런다.

 

다시 차를 몰고 그쪽으로 갔는데 거기 역시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인다.

대신 안치소 검색 패널이 커다란 브라운관에 뜬 게 보인다.

 

그쪽으로 가서 부고 문자로 보낸 '큰어머니 함자'를 넣고서 검색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

둘레둘레 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서부터 감이 잡히더라.

저만치에 아는 친척 얼굴도 보이고-

 

그들은 벌써 향배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에 우리와 맞닥뜨렸던 거였다.

그렇게 안치실 위치를 알아냈는데, 아직 두 분 사진도 없다.

 

그곳 관계자가 올 11월쯤에나 게시할 예정이란다.

- 뭐 이런 개떡 같은 행정이 다 있나???~~~!!! -

 

만에 하나 윤석열이 오늘 당장에 여기에 안치된대도 나는 절대로 찾을 맘이 없다.

그나저나 우리 백모님 사십구재를 여기서 치르자고 하던데 우리 큰형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타인에 해 끼치지 않고 그걸 어떻게 치르자는 건지 원^